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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성장과 지역발전을 지향하는 평생학습도시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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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 제 59 회 진주시민 교양강좌
  • 개최일자 : 2015년 9월 21일
  • 강사 : 서명숙

주제 : 간세다리 여행길
강사 : 서명숙

오늘 강의를 해 주실 서명숙 강사님을 소개 올리겠습니다. 서명숙 강사님은 제주도 성인부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신 후 시사저널 정치부 기자,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시사인 편집위원으로 23년간 언론에 종사하셨고 현재는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을 역임하고 계십니다. 은퇴 후 고향 제주에서 아름다운 제주 올레길을 개척하셨고 저서로는 ‘제주올레 여행’ 외 다수가 있습니다. 멀리 제주에서 진주시민을 위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서명숙 강사님의 강의를 경청해 주시길 바라며, 강사님을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진주를 천릿길을 실감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 왔는데요, 서울에 있을 때는 사실 진주 오기가 차 한 번만 타면 쭉 오니까 직장생활 할 때는 진주를 가끔, 몇 년에 한 번씩은 왔었어요. 거의 시간 빠듯하게 10분 전에 도착을 했는데요, 다섯 번의 교통수단을 갈아타고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제주시에서 비행기, 김해공항, 김해공항에서 진주시로 왔습니다. 진주시도 참 아름다운 도시죠. 저는 여러 번 와 봐서 어느 정도는, 다는 모르지만, 여기도 굉장히 역사도 오래된 도시고 굉장히 자랑스럽지만 또 비극적인. 여러분들은 여기서 나고 자라서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이북이지만 어쨌든 저는 태어난 곳 자체가 제주돈데,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살면서도 제주도를 어렸을 때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굉장히 생각이 달라졌지만, 어렸을 적에는 그 지역 제주도의 역사도 잘 몰랐고, 우리나라는 지역 역사에 대해 안 가르쳐 주잖아요. 로마 역사니 세계사, 조선왕조 뭐 그런 건 가르쳐 주지만 정작 그 지역의 향토사는 안 가르쳐주기 때문에, 지금은 다양한 교재가 나와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국정교과서 하나 단일화해서 맨날 시험보기 위해서 국사, 세계사를 달달달 외웠으니까 정작 제주도 역사에 대해서 잘 몰랐고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고장을 어렸을 적에 제대로 정규교과 과정으로 배우시진 않았으리라 생각이 돼요. 그래서 제주도 역사도 잘 몰랐고, 제주도 자연이 그렇게, 여러분들도 진주의 남강이나 촉석루의 아름다움을, 다른 곳을 가봐야지 ‘아, 우리가 가진 것이 대단하고 좋구나.’생각이 들지, 그 지역에만 있으면 하나도 대단하게 생각이 안 들어요. 저도 그랬었어요. 제주도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한라산이 그렇게 대단한 산이라는 생각도 안 했고 정관폭포, 천지연폭포... 저는 엄마한테 혼날 것 같으면 도망갔던 곳이거든요. 그냥 일상의 공간이지, 난대림이 어떻고 폭포의 장관을 이때는 잘 몰랐어요. 그냥 저 주변에 항상 있던 공간들. 오히려 대학교를 서울로 가게 되면서 ‘아, 이제는 이 좁고 답답한 섬을 벗어나는구나.’ 제주도에 대한 애향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시골의 특징이 있잖아요, 어른들이 막 간섭하는 거. 친척들이 명절 때 와서 공부 잘 해라, 누구 집 딸이 뭐 어쩌고저쩌고, 저는 간섭받는 게 어렸을 때 싫었기 때문에, 서울에 왔으니 난 자유다, 제주도는 그냥 친구들 보려고 잠깐씩 가지, 거꾸로 귀향, 귀촌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서울에서 쭉 살고, 가능하면 외국도 가서 살아야지. 이런 포부를 갖고 19살에 서울을 간 거죠. 그래서 서울에서 졸업하고 언론사에 들어갔어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꿈이 기자였기 때문에, 중학교 때 책을 읽다가 기자가 돼야지, 원래 글 쓰고 책 읽는 걸 좋아했는데 그냥 작가가 되면 굶어 죽을 것 같고 먹고산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근데 기자는 글 쓰면서, 최소한의 월급은 주니까 먹고살 수도 있고. 그래서 기자라는 직업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자기가 직접 뛰어들어서 취재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자가 됐고 기자를 했어요. 시사 주간지에서, 그때는 여자가 기자를 별로 안 할 땐데 특히 정치부에 여자가 거의 없고 다 남자들이었어요. 미친 듯이 열심히 했어요. 시골에서 올라간 사람들이 특징이 있잖아요. 어떻게든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다, 제주도 대표선수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촌놈 근성으로 열심히 했어요. 무지무지 열심히 하다 보니까 여자지만 조금 조금씩 올라가서 처음으로 여자 편집장이 되어 봤죠. 꿈을 이룬 거죠, 어쩌면. 그 조직에 들어갈 때 누구나, 교사가 되면 교장선생님, 그게 목표는 아니지만 그 직업의 꽃인 거죠. 그래서 편집장이 됐는데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너무 힘든 거예요. 높은 사람이 되면 더 편해질 줄 알았는데 더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아요. 그러면서 몸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가 걷는 것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죠. 스트레스, 과로 때문에 몸이 너무 나빠졌는데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다 하고 일주일 만에 통보를 받으러 갔는데 무슨 병이 안 나왔어요. 나오기를 기대하고 갔는데. 왜? 무슨 병이 있어야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거나 수술을 하든, 약을 먹든 해야 몸이 나아질 것 아니에요. 옛날에는 몸이 완전 건강했는데 편집장 되고 몇 년 뒤부터 완전히 몸이 절단이 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병원에서는 특별한 병이 없다고 하니, 이거는 이 상태로 계속 살아야 되는 건가 싶어서, 오히려 병명이 없다는 게 더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머, 있어야 되는데.” 나도 모르게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래서 의사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아침 점심 저녁이 옛날하고 완전히 다른데, 막 이랬더니, 아침에는 눈 뜨기 힘들고, 점심때는 머리를 송곳으로 막 찌르는 것 같고, 편두통이죠, 저녁때는 너무 지쳐서 마지막 지하철 타고 왔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오히려. 너무 피곤하니까 불면증 비슷한 거. 제가 너무나 이러면 아무런 변화 없이 계속 개선이 없을 텐데, 그러면 난 어떻게 사나 그랬더니 의사선생님이 처방을 내려줬어요, 3가지. 그게 뭐냐 하면, 첫째, 과로하지 마라, 둘째, 스트레스를 받지 마라, 세 번째, 하루에 무슨 운동이든지 한 가지를 매일매일 30분씩이라도 해줘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몸을 움직여줘라. 그동안 너무 머리만 쓰고 산 거예요, 몸은 하나도 안 움직이고. 서울 생활이 맨날 그렇잖아요. 집 앞에서 지하철이든, 택시든, 자가용이든 맨날 뭘 타고 가서, 또 기자라는 직업이 뭐에요, 뭐든 빨리 가야 되잖아요. 밥도 빨리빨리, 밥도 어디 가서 한가하게 먹을 생각 못해요. 총알처럼 얼른 먹고 얼른 나와야 되고. 그래가지고 저는 운동이라고는 해 본 역사가 없는 거예요. 중고등학교 때 억지로 마지못해 한 운동을 빼 놓고는 성인이 돼서 내가 선택해서 해 본 운동이 없는 거예요. 어쩌다가 일 년에 한 번 회사에서 등산가는 것 정도. 그런 것도 가면 제가 제일 먼저 퍼져서 “난 못 올라가. 헬리콥터 불러줘.” 막 이러는 사람이었는데, 운동을 하라니까 그때부터 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마흔 일곱 때에요. 마흔 일곱 돼서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했는데요, 헬스클럽부터 해봤어요. 헬스클럽 한 며칠 다니고 말았죠. 러닝머신 위에서 걷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내가 걷는 건지 마는 건지, 내려오면 막 기계하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싸운 것 같은. 그래서 안 해, 못하겠더라고요, 재미도 없고. 그러고는 에어로빅도 다녀봤는데 동작을 못했어요, 동작을 잘 못 따라하겠더라고. 첫날에는 선생님이 막 친절하던데 그 다음에 잘 못하니까 저도 쪽팔리고 해서 안 했어요. 그 다음에 수영, 뭐 이것저것 다 했는데 다 못 따라가는 거예요. 또 제주도 출신인데 어릴 때 개헤엄을 배워 버리니까 오히려 정식 수영을 못하겠는 거예요. 생존 수영에 너무 익숙해져서 개구리 동작이 계속 나와서 못하는 거예요. 다 못하고 돈만 날렸어요. 다 선불이라 돈만 내고 한달 동안 다닌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맨 마지막으로 제가 선택한 운동이 뭐였을까요, 삼촌들? “숨쉬기.”(청중들) 에이, 숨쉬기는 너무 했다. 그렇죠, 걷기죠. 숨쉬기는 일부러 웃기려고 한 거죠? 걷기를 했으니까 나중에 올레길을 냈겠죠. 걷는 걸 마지막 최후의 수단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게, 걷는 거는 남에게 배우지 않아도 된다, 돌 때부터 걸었잖아요, 어쨌든. 육지에서 바쁜 생활하면서 길게 안 걷고, 잘 안 걸었다뿐이지 걸을 줄은 아니까. 두 번째, 걷는데 골프나 탁구나 배드민턴처럼 파트너가 필요해요? 혼자도 할 수 있죠. 저는 기자니까 시간 맞추기가 워낙 힘들어서, 아침에 시간이 날지 저녁에 시간이 날지 모르니까. 혼자 해도 되지만 또 장소불문이야. 걷는 건 도로 옆에 걸어도 되고 공원이나 뒷산을 걸어도 되는 거고. 저는 참고로 등산은 못해요. 200-300미터 정도 높이 올라가면 폐가 압박이 오기 시작해서 평지를 걸어야겠다 싶어서 동네 학교 운동장부터 걷기 시작했어요. 제가 의식을 갖고 살기 위해서 운동으로써 걷기를 시작한 게 47살 때. 첫날에는 15분을 걸었어요. 그게 제가 걸을 수 있는 최대치였어요. 15분 걷고 지쳐서 아우, 다리아파. 땅기는 거야, 안 걷다 걸으니까. 지금은 15시간도 걷죠. 사람의 몸도 쓰기 나름. 10년 전에 젊었을 때 15분 걸었는데 지금은 10년이나 흘렀는데 정말 시간만 나면, 나중에 얘기를 하겠지만 저는 외국에 살 때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15시간 걸은 적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사람 몸도 쓰기 나름인 거야. 안 쓰다 보면 못하는 거고, 자꾸 하다보면 나이에 관계없이 그게 훈련이 되니까 내가 많이 걷게 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서서히 중독자의 세계로 들어가요. (청중에게) 선생님이 아시는 중독? 본인 게 아니더라도 알고 있는 중독.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도박. 요즘 젊은 세대는 게임. 이 중독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면 기분이 좋은 거예요. 도박도 기분이 좋으니까 하지, 막 괴로운데 도박하지는 않아요. 가족이 괴롭지, 본인은 좋아. 술도 그래요. 마약도 지켜보는 사람이 괴롭지, 본인은 좋으니까 하는 거예요. 짜릿하고 좋으니까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두 번째 증세는 성질나고 짜증나고 스트레스 팍팍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박 못하게 하면 담 튀어서라도 넘어가서 하고 그러잖아요. 술 마시는 사람을 술 못 마시게 하면 막 숨겨놔서라도 먹고 이러는 건데 새해 1월 1일에 맨날 금연하겠다고 작정한 남편이 한 3일 금연해서 하루 이틀만 지나가면 너무 짜증내는 바람에 그냥 피워라 피워, 하는 부인도 봤어요. 막 정신없어 하고 사소한 일에 짜증내니까. 그러고 중독의 세 번째 단계는 뭐냐. 할수록 단계를 높이고 싶어져요. 마약도 약한 대마초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센 걸로 가서, 이번에는 정치인의 사위가 열매로 된 마약을 했다고 해서 한동안 시끄러웠는데, 암페타민이라고 굉장히 강한 마약까지 하게 되는 거거든요. 대마초만 계속 쭉 하는 사람은 없어요. 대마초로 시작했다가 히로뽕으로 갔다가 히로뽕에서 암페타민. 이런 식으로 점점 더 자극을 높여가고 싶어져요. 그래서 무섭다는 거죠, 중독이. 술도 처음부터 말술 먹는 사람 없어요. 처음에는 한잔으로 시작했던 술이 점점점점 늘어서 말술이 되는 건데요, 저도 걷기 중독자가 되면서 그 3가지 증세가 다 나타나요. 처음에는 내 건강을 위해 억지로 걸었던 건데 즐거움을 아니까, 몸이 풀리는 느낌, 걸으면 힘들어야 되는데 몸이 좀 적응되고 나면 몸이 찌뿌둥했다가도 걸으면 좋아져요. 근데 못 걸으면 막 짜증이 나요. 비바람 오는 날 못 걷게 되면 그냥 몸 컨디션이 망가져버려요. 그리고 점점 더 길게 걷고 싶어지는 거예요. 걷는 거에서 강도를 점점 높이고 싶은 게 뭐겠어요, 거리를 점점 더 길게 걷고 싶어지게 돼요. 처음에는 15분도 힘들어서 이랬던 사람이 점점 더 걸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한창 걸으러 다닐 때, 여기도 한번 왔었던 거예요.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2박 3일씩 텀으로, 울릉도도 2박 3일 갔다 오고. 왜 섬과 지방도시를 많이 왔냐면 서울 근처에는 길게 걸을 만한 길이 없어. 북한산 등반로 이런 거 빼놓고는 전부 찻길과 대로변밖에 없잖아요. 옆에 계속 차 소리 들으면서 다녀야 되는데 차 통행량이 좀 적은 지방도시나, 그것도 성에 안 차면 섬으로 들어가서. 이러면서 걷기 시작했는데, 어디선가 책을 읽다보니까 ‘산티아고길’에 대해 본 거예요. 스페인에 있는 길이라는데 800km를 사람들이 자고 먹으면서, 프랑스 국경마을에서 시작해서 800km를 스페인 북부지방을 다 돌다가 어느 성당에서 끝나는. 굉장히 유명한 길이에요. 이 길에 대한 책을 읽고 나니까 ‘아, 여기 한번 가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중독자의 마지막 증세, 더 강도를 높이고 더 길게 더 센 길을 걷고 싶다, 그렇게 된 거죠. 그런데 꿈은 가졌지만 계속 못가고 있었어요. 왜? 800km니까 한 달 이상 걸려요. 20km씩 40일을 걸어도 한 달 이상 걸리고 25km씩 걸어도 한 달 이상이 되니까. 직장에서 편집장인데 그런 휴가를 받을 수 있나요, 언론사가. 길게 휴가 안 주죠. 그래서 계속 가고 싶어 하면서도 못 갔어요. 3년 동안 내내 못 가고 있다가 나이 50살 될 때 제가 결단을 내렸어요. ‘나이 쉰 될 때에 더 이상 미루지 말자. 언론사 25년 많이 다녔다. 이제 하산하자.’ 그래서 50살 되는 해 여름에 제가 사표를 냈어요. 내고 산티아고를 가자, 갔다 와서 뭐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산티아고에서 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더 이상 꿈을 유예하거나 꿈을 미뤄두지 말고 더 늦기 전에 한번 가자. 그만두고 2달 동안 한강에 나가서 매일 12km씩 걸었어요. 연습을 하고 가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면 내가 아무리 울릉도에 가서 걷고 고길도에 가서 걸었지만, 이거는 하루 이틀 걷는 게 아니라 한 달 이상 그 무거운 배낭 메고 쭉 걸어야 되는 거니까 기초체력을 확실히 하고 가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꽤 많거든요. 비싼 비행기 돈 들여서 스페인까지 갔는데 중간에 빠꾸하긴 좀 그래서 어지간히 몸을 만들고 가자 했죠. 저희 친정어머니는 사표 냈다고 난리가 났죠. 저 대신에 남자애 둘 키워주면서 딸이 출세하기만을 바라면서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하루아침에 엄마한테 동의도 안 구하고 어느 날 집에 들어와서 “저 사표 냈어요. 저 산티아고 갈 거예요.” 이러니까 걷는 거에 어느 순간 제가 미치기 시작하더니 진짜로 미쳐버렸다고 생각한 거예요. 생전 걷지도 않던 애가 갑자기 새벽에도 걸으러 가고 밤에도 걸으러 가더니 이제는 외국에 나가서 걷겠다고 직장까지 때려쳤다 생각하니까 얼마나 한심했겠어요. “엄마, 나는 지쳤어요. 25년 동안 기자생활 하면서, 나 더 이상 가면 나사가 끊어질 것 같아.” 그랬더니 “나는 34년이나 가게를 했어도...” 저희 어머니가 서귀포에서 식료품점을 했는데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서 올레 시장이 됐지만 그게 상설시장이었어요. 저희 어머니가 식료품 도소매 가게를, 이름이 ‘서명숙 상회’였어요, 제가 한 살 때 가게를 하면서 그냥 제 이름으로 가게 이름을 지었는데 저는 막 싫었어요, 제가 ‘서명숙 상회’ 딸인 거예요. 제 이름이 서명숙인데 ‘서명숙 상회’ 딸. 저희 어머니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그 당시에는 여자를 공부시켜주는 시대가 아니니까, 초등학교 때 공부를 꽤 잘했는데도 여자라고 상급학교에 안 보내준 그 한이 있어서 저를 콩나물장사 해서 서울에 대학 보내 놓으니까. 저희 어머니가 미원, 설탕, 식용유점 다 했는데 콩나물만 강조해요. 그 중에 한 게 콩나물인데. 자기 고생했다는 걸 어떻게든 보이려고. 남이 보면 “다라이 하나 놓고 콩나물장사 해서 너를 키웠더니 직장 사표 던지고, 먹고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걸으러 간다고 직장을 때려치질 않나, 멀쩡한 국장이라는 자리를 던져놓질 않나...” 그래서 저희 어머니랑 저랑 엄청 싸웠어요. 저는 나이 오십 됐는데, 내가 번 돈으로 가겠다는데 그것도 못하냐고, 나도 이제 어른이라고, 그래서 어머니한테, 부모한테 처음으로 정면으로 거슬려본 거, 어머니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한 게 저는 50살 때 했다고 봐요. 그 전에는 내가 하는 게 다 어머니가 고개 끄덕일 정도의 일이고, 내가 엄친아는 아니지만 어머니가 고개 끄덕이는 일을 해서, 장난으로라도 엄마를 거슬려 본 적이 없거든요. 엄마랑 저랑 어마어마하게 싸우는데, 제 아들이 그때 20살이었는데 아들이 제 편을 들어줬어요. 엄마랑 싸우면서 중학생이 막 떼쓰듯 다리 뻗고 막 울었어요. 그랬더니 제 아들이 와서 물 마시라고 하면서 “할머니는 내가 설득할 테니까 엄마는 다녀오세요. 엄마는 거기 갈 자격이 충분해요.” 고생했다 그거예요. 할머니하고 중학생 동생은 자기가 돌볼 테니까 엄마는 안심하고 갔다 오라는 거예요. 되게 말 안 듣는 애였는데 그때 한 번만 효도를 한 거예요. 그래서 산티아고를 갔다 와서 보니까 뭐 걔가 특별히 할머니나 동생을 돌본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제 마음을 안심시켜 준 거, 그리고 내가 아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구나, 엄마는 반대를 해도 아들은 떠날 자격이 있다고 인정을 해 주는구나, 내가 헛살진 않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연습하러 다닐 때 낮에는 한강을 걷고 저녁때마다 사회생활 하면서 친해진 여자들한테 “나 산티아고 간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귀가 솔깃해가지고 “어머, 나도 갈래.”, “그런 데가 있었어?”, “나도 가고 싶었는데.”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면서 한명한명 다 따라나서겠다는 거예요. 해서 저를 포함 7명까지 늘어났어요. 저도 한 달 이상 혼자 배낭 메고 떠날 생각 하니까 두렵고 불안했는데 처음 한두 명이 같이 가주겠다 하니까 나는 별 걱정 안 하고 가도 되겠다 했는데 너무 숫자가 많아지는 거예요. 이거는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남녀노소가 친구가 되는 거죠. 집에 금송아지 다섯 마리 있는 것도 소용없고, 과거, 현직이 뭔지 다 상관없어요. 이 길에선 그냥 다 똑같은 길동무야. 똑같이 다 침대 한 칸 얻어 쓰는 사람이에요. 여기서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야. 과거를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 정도만 물어보고, 몇 살도 안 물어봐. 대부분 얘기하는 게 “오늘 길 걸으면서 너는 어땠니? 느낌이 어땠니?” 저는요, 29살짜리 캐나다에서 온 가수도 만났었는데요, 제가 나이 든 여자, 나이 적은 여자, 남자 여자... 이 사람이 혹시 누군지 아시는 분? 네, 맞아요. ‘파울로 코엘료’라고 되게되게되게되게 유명한 세계적인 소설가예요. ‘11분’, ‘연금술사’, ‘순례자’ 뭐 이런 거 쓴 작가인데요,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이 분을. 일부러 한국에서 인터뷰 요청해도 한 번도 한국에서 인터뷰 안 하는데 길 가다가. 이 작가는 여기에 뭐 하러 왔냐면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온  거예요. 코엘료와 산티아고 길에 대한 영국 BBC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어요. 근데 제가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발견하고서는 같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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