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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성장과 지역발전을 지향하는 평생학습도시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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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 제 58 회 진주시민 교양강좌
  • 개최일자 : 2015년 4월 1일
  • 강사 : 김장실

               제 58회 진주시민교양강좌
              주제: 한국대중가요의 정치 사회학
  
             ㅁ 일시: 2015년 4월 1일 (수요일)
             ㅁ 시간: 오후 3시
             ㅁ 장소: 진주시청 시민홀(2층)
             ㅁ 주최: 진주시       

우리나라의 가요를 이론으로 전개하고 가르치는데는 누구도 따라갈수 없습니다.

실제로 내용도 있고 재미도 있고 아주 훌륭합니다.

근데 사실 김장실 의원님이 이걸 해주기가 시간이 잘 안납니다.

제가 이걸 한번 해주십사 한게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꼭 우리 이분은 진주시민에게 특별히 모셔다가 시민을 위해서

강의를 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안오신분들은 후회할테니까 가서 마음껏 자랑하십시오

김장실 의원님 모시겠습니다.

 

이 시장님께서 과찬을 해주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사람이 열심히 일하다가 휴식을 취하는 시간인데

제가 노래를 부르면 같이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사람들 노래 가락이 달라지기 시작한건

120~130년전에 카톨릭과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어서 교회 찬송가가 들어오게 되어서

노래 가락이 찬가라고 바뀌게 되었고 교회 음악곡조 에다가 우리 가사를 적당하게 넣어서

학도가 이런 것 부르게 시작한게 1800년 후반부터 1900년 초반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온 음반들 1910년 음반을 보면 1면에는 판소리고 2면에는 찬가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다가 1920 년이 되면 예술가곡이라는 이름의, 우리 중고등학교때배웠던 가곡 형태가 유행하다가 1926년에 윤심덕이라는 사람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양출신의 소프라노 가수인데 이분이 오사카 음반회사에 가서 취입한 노래가 사의 찬미입니다.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 하는 노래인데

노래도 물론 잘 불렀습니다만 이분이 목포 출신 김무진 이라는 동료 여학생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다 좋아하는 노래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대중가요입니다.

그래서 한국 대중가요는 1920년대부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대중가요는 억수로 나오기 시작했지요. 요즘은 하루에도 몇곡씩 나오고 1년 지나면 수백곡이 안되겠습니까? 수천곡이 되겟지요 . 그중에서 5년이나 10년 단위로 한곡을 선택해서 제일 히트한걸 선곡을 하면 그 노래는 반드시 오늘을 살고 있거나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1920 년 이후로 5년 혹은 10년 단위로 끊어서 가장 히트했던 노래를 골라서 그 노래가 어떤 시대정신을 담았는지 그리고 그런 시대정신과 연관된 정치 사회적 사건들은 뭐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만 살펴보면 별 재미가 없죠

그래서 그 노래를 만들었던 가수와 작곡가와 작사가와 음반 제작자와 팬들 사이에 있엇던 연애사적 재미를 부가하는 것으로 설명을 드리는 것으로 진행을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지요 ?

 

1927년도에 나왔는데 옛날에 연극하고 노래부르던 사람들은 그 단체를 이런 극장 같은데서 하다가 그것만 가지고 수입이 안되니까 순회 악극단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그중에 연극사 라는 단체에서 순회악극단을 만들어가지고 저 만주 지방하고 조선 팔도를 돌아서 밥벌이를 하러 다니는데 대체로 20~30명 단위로 다닙니다.

여기에 작곡가 정수린 선생하고 왕평 이란분은 연극사람 순회악극단 일원으로 만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신의주와 평양 공연을 마치고 황해도 배척이라는 곳에 왔는데 그날 비가 닷새가 연속으로 와서 공연을 하지 못합니다.

정수린 이라는 분 고향이 개성인데 잘 아시다 싶이 고려왕궁 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고향 개성만월대가 생각이 나고 그 을시년스러운 가을날 풍경이 생각이나서

비오는 날 밤에 잠을 안자고 바이올린을 켜면셔 황성옛터를 작곡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다음날 아침에 경북성주 출신의 왕평이라는 사람한테 내가 이렇게 작곡을 했는데

니가 가사를 좀 지어주라 하니까 이 사람이 가사를 지어가지고 그렇게 서울로 돌아와서

평양에 호스턴 여고를 졸업한 16살 짜리 막간 가수한테

요즘은 예술의 전당에 가면 막과 막 사이에 미리 했다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싹 돌아가지고

연극이나 오페라든 끊기지 않는데 옛날에는 그런 장치가 없기 때문에 막을 뜯어내고

또 설치하려면 그 사이에 시간이 필요하니까 막을 다시 열때까지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습니다. 이애리수도 막간가수인데 나와가지고 불렀더니 이 노래가 무슨 전염병이 확산되듯이

마치 그렇듯이 처음 나온 노래인데 극장에 있는 사람들이 막 눈물을 흘리면서 재창 삼창을 합니다. 그런데 일제가 조선사람들을 작사가 왕평하고 작곡가 전수린을 족쳤습니다.

뭣 때문에 이런 노래를 만들었느냐 했는데 잘 둘러대서 풀려나고, 다시는 이 노래를 부르지 말라 했는데 극장 문만 열면 어찌 사람들이 황성옛터를 불러달라 하니까 부르다가 가수 이애리수가 머리가 질질질 끌려나갈 정도로 그랬답니다. 음반으로는 1932년에 나왔는데

이 노래는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같은걸 담고 있습니다. 1910 년에 한일 합방이 된 이후로

밥 먹고 사는 일반 민중들이야 누구든 상관있겠나 생각했는데 막상 일본 사람이 와서 조선 사람을 발밑에 때보다 못여기고 사람을 족치고 경제적인 수탈을 하다 보니까 19193.1 운동을 했습니다만 안되고 192660만세 사건을 일으켰는데 안되고 29년에 광주학생 사건을 일으켰는데 간단하게 진압당햇습니다. 그래서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까지 한국사람들은 마음속에 일본놈들 한테 지배당하는게 이렇게 서럽구나 하는 울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울분을 터트릴대가 없었는데 그래서 이런 노래를 여기저기서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음반을 만들었는데 정말 잘 팔렸답니다.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우리 같이 불러봅시다. 누가 이노래 부를 사람 있습니까 ? 부를 사람 나와 보세요

일단 제가 시범 삼아 부르고 나중에 다른 노래는 같이 불러봅시다.

 

노래부름

 

이게 1930년대가 되면 몇몇 소수의 눈 밝은 사람은 제외하고는 다들 독립은 틀렸다 생각하고

일본 사람들이 토지조사사업이니 삼미증산계획이니 해가지고 하면서 경제적인 수탈이 강화되어가지고 조선에서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 마침 일본이 만주 지방을 점령을 해가지고 만주에 본격적으로 개척을 하게 되는데 만주는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운 신성한 곳이라

옛날에 봉건지역을 선포해가지고 아무도 들어가지 마시오 해서 비워놨다가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서 아시아 쪽으로 오다보니까 아무로 강을 넘어서 청나라로 들어오니까 전쟁이 벌어진 이후로 경계를 확정지으면서 그대부터 안되겠다 해가지고 텅 비워놨던 만주에 사람을 살게 시켰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1931년에 만주 사태를 일으켜서 1932년 겨레 만주국을 세우면서 5족 협화 라고 해가지고 조선족 일본사람 중국사람 그다음에 몽골 사람 만주사람 이라고 해가지고 다섯이 행복하게 산다 해서 만주에 가면 좋은일이 생길거다

좋은 사람 만날거다 해가지고 만주 열풍이 일본에서 불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옛날 구 동경에 있는 일본은 낡은 체제이고 만주국에 새로 새운 일본은 이상국가다 하는 일본 군부내 계획주의자 들이 가져가지고 만주를 낙원이다 라는 선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와 소설과 라디오와 별걸 다 동원해가지고 이렇게 하니까 식민지 조선에서도 만주 파라다이스 론이 영향을 미쳐서 그래서 너도나도 만주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800년대에는 몇만명 정도로 조선사람들이 먹고 살려고 강을 넘어서 농사를 지으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니까 한해에 수십만명씩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 해방 될 때에는 무려 200만의 조선인이 만주인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제 제일 많이 갔느냐 1930년 이후로 제일 많이 갔습니다.

만주에 가서 개장사로 해서 잘살아보겠다고 가신분도 있고 독립운동하러 가신분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만주에 관한 소설 만주에 관한 시. 영화가 쏟아져 나왔는데 만주에 관한 대표적인 영화는 복지만리입니다. 대중가요는 꽃마차입니다.

원래 노래하자 하얼빈 춤추는 하얼빈 이렇게 된게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니까 하얼빈을 꽃 서울로 바꿨습니다. 같이 불러 보겠습니다. 같이 부를 사람 있습니까 ?

 

노래하자 하루빈 춤추는 꽃서울

아카시아 숲속으로 꽃마차는 달려간다

하늘은 오렌지색 꾸냥의 귀걸이는 한들한들

손풍금 소리 들려온다 방울소리 들린다~

 

다른 좋은 노래 있으니까 그때가서 2절까지 부릅시다

 

원료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공업생산 원료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예를 들어서 멘하이 있죠 ?

80퍼센트가 사실은 미국에서 들어왔고 석유생산의 미국에서 들어왔고 그렇습니다.

고무는 60~70퍼센트가 미국을 통해서 하고 그러니까 경제제제를 하니까 일본 사람들이 석유를 어디서 구할까 하다가 그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이런데에서 석유가 나니까

거기로 가야겠다 싶어서 남쪽으로 침입을 하지요. 그러니까 더 경제제제를 가하니까

1941년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 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 말은 일본이 힘에 버겨운 전쟁을 계속하면서 침략을 확대 하니까

어떻습니까 전시 총동원 체제가 1937년부터 내려지기 시작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대중가요라고 하는 대중가요를 제대로 부를수가 없습니다.

진주만 폭격이후로 태평양전쟁이후로 대중가요가 아니고 전부 전쟁가요 위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어쨌든 일본이 계속 이기고 있다는 방송이 나오고 하니까 국내에 앉아있는 사람은

도대체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미국이 계속 밀고 들어오고 본토에 폭격 하고 하는데도 항복을 안하니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두 개를 터트리니까

1945815일날 항복선언을 합니다. 이건 우리가 만든 독립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일본 사람들한테 한없이 짓밟히다가 해방이 되니까 얼마나기분이 좋겠습니까 ?

해방이 되니까 너도나도 기쁨을 드러냅니다. 해방이 된 기쁨을 드러내는 시와 소설이 잇지만

대중가요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해방의 기쁨을 표시한게 1940년대의 시대 정신이람녀 그걸 가장 성공적으로 드러낸게 귀국선입니다.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 이인권 노래인데

잘 아시겠죠 ? 이재호라는 분은 진주 출신입니다. 예로부터 진주에는 뛰어난 작고가가 많고

남인수 선생등 가수가 많습니다. 자 귀국선 같이 한번 불러봅시다.

 

해방이 되어가지고 다시는 남의 밑에서 고생하지 말자는 고생을 했습니다만은 또

해방 이후에 이미 우리 사회는 3가지로 분열이 되어있었습니다.

이승만과 한민당을 주축으로 하는 소위 우파민족주의 세력은 자유 민주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갖고 한번 잘 살아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에 반해서

박은련하고 우리 흔히 말하는 빨갱이 들은 공산주의로 해보자

김구, 김규식 선생은 양자를 통합을 하자 이렇게 해가지고 혼란이 극에 달합니다.

그래서 안되겟다 싶어서 1946년 이승만 대통령께서 정읍에 가가지고 이렇게 혼란스러울 바에야 상황이 안되니까

상황이 된 데만이라도 자유민주체제를 하자 한게 정읍 발언입니다.

이런 움직임이 있으니까 좌파들이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일이 무엇입니까 ? 대구 폭동사건 제주 사삼사건 이런것들은 바로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의 합법적 절차에 의해서 진행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미군정이 결정적으로 좌파를 몰아내게 된 것은 정판사라고 해가지고 인쇄하는데에서 위조지폐를 찍어가지고 빨갱이들이 유포를 시키니까 대대적인 숙청이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어려운 과정을 거쳐가지고 1948815일날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좌파들은 1946년에 북조선 위원회를 만들어가지고 따로 남한을 공산화 시키려고 하다가 그게 잘 안되니까 다시 북한 정부를 수립하는 그런 절차에 돌입해가지고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대중가요에서는 이러한 나라가 분단된거에 대해서 서러워 하는게 많은데 그중에 대표적인게 남인수 선생이 불렀던 가거라 38선입니다.

세월은 흘러가서 1950년이 되어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하고 중국의 노택동을 설득을 해서 무려 5차례 이상을 방문해서 무력으로 남한을 통일 하려는 계획을 꾸려서 625일 남쪽으로 침입을 해왔습니다.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이 되고 한달도 안되어서 수도가 부산까지 되어버리고 한반도 전역이 공산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도미노 하나가 쓰러지면 다 쓰러진다 해서

공산주의를 한국에서 방어가 안되면 다른데에서도 안된다 해서 16개 국가가 참전을 하면서

대체로 7월말 부터는 전열이 정비가 되고 8월부터는 반격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수행을 하면서 928일 서울이 수복이 되고 10138선이 돌파가 되고 10월 말쯤 되면은 압록강 두만강까지 올라가게 되죠

그런데 그때는 이미 수십만의 중공군이 매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올라오기만 해봐라 하고

반격을 해서 다시 후퇴를 했습니다. 한반도 지형을 보면 서족은 평탄하고 동쪽은 억수로 높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간 군대는 멋도 모르고 계속 진격을 하다가 웅크리고 있던 군대에 포위가 되어가지고 고생을 치뤘습니다. 장전호 전투에서 대패를 한 국군은 개마고원에서 내려와서 황남으로 철수하는데 중공군에 8중 포위를 당했습니다. 그때 추워서 동상에 걸려서 죽기도 하고 다쳐서도 죽고 그래가지고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철수를 하고 있다가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거기서 세계전쟁 사상 대규모적인 철수작전을 펼칩니다.

함정을 수백척을 동원을 해서 군대를 철수 시키려니까 북한 사람들이 따라와서 우리도 같이 가게 해달라고 해서 흥남부두에서 수십만명이 미군이 할수 없이 무기를 버리고 북한 사람을 싣고 거제에 떨어 뜨려 놓으면 그분들이 먹고 살려고 부산까지 가서 부산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봄날은 간다 이 노래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쟁 때문에 젊은 청춘들이 마치 아침의 해 떨어지기 전에 풀잎에 맺혔던 아침 이슬이 떨어지듯이 젊은 청춘이 사라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50년 때는 전쟁통에 60년대와 70년대에는 경제 건설한다고 그리고 70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 한다고

일차 후퇴를 거쳐서 다시 이차를 거쳐서 부산으로 넘어 왔던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넘어온 사람이 580만명 정도 살았답니다. 그러다 보니까 먹고 살기가 막연하지요.

음식물 쓰레기를 푹 끓여가지고 꿀꿀이 죽이라고 해서 만들어서 먹고

수돗물이 안나와가지고 씻지도 못하고 그렇게 해서 비참하게 살아가면서

처음에는 눈물만 흘리다가 흥남부두에서 버리고 떠나온 부모와 형제와 처자가 생각이 나다가도 세월이 지나니깐 잊어버리고 옆에 있던 경상도 아가씨가눈에 들어와서 서로 사랑을 한답니다 그러다가 1953727일 휴전 협상이 완료가 되어가지고 그러니까 이북서 온 사람들이

고향 하고 가까운 서울로 가면 틀림없이 내가 버리고 왔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려니 해서 서울로 많이 갑니다. 그런데 그동안 사귀었던 경상도 사람들이 그냥 보내주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 니죽고 내죽자 못간다 이렇게 하는걸 떨어트리고 가려고 하니까 아가씨들이 기가차서 영도 다리에서 떨어져 죽고 영도 경찰서에서는 순찰을 두배로 강화했다는 신문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짝 떨어트려 놓고 부산역으로 나왔더니 이놈의 아가씨가 어찌 또 알고 옆차편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사나이의 심정은 복잡합니다.

서울에 올라가면 어떤 식으로든 버리고 온 부모 형제 처자식을 만날 수 있는 반면에

차창밖에서 울고 있는 경상도 아가씨를 버리고 가려니까 속이 뒤집어 집니다.

이별의 정거장은 사나이의 그런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 작사, 박시춘 작곡, 진주 출신의 남인수 선생이 불렀던 노래 같이 불러봅시다.

 

1950년대가 되면은 먹고 살려고 별짓을 다 안합니까

우리나라가 3면이 바다였는데 조선시대때 바다 나가는걸 아주 천시하고

뱃사람들을 아주 상놈으로 치고 하니까 바다가 개척이 안되었습니다.

1958년도에 고려원양이라는 회사가 원양어업을 세운 이후로 처음에는 우리나라 배가 없으니까 외국 배를 많이 타다가 나중에느 우리나라 배가 많이 생기니까 배 타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저희 고향 남해같은데는 특히 배타는 분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육지에 근무하는 것 보다 3배에서 5배 월급을 많이 줍니다. 그래서 배를 많이 탓는데

배 타는 사람들 잘 아시겠지만 일본말로 기마니가 참 좋죠. 기마니가 좋아서 가 아니라

멀리 바다만 보고 사는 젊은 사나이들이 길게는 1년 짧게는 6개월 가까이 바다만 보고 있다가 눈이 뒤집어 집니다. 그러면 분 바른 여자들 하고 사랑을 속삭이다가 그러고 1개월 2개월 배를 수리도 하고 그래가지고 나가버리고 정들었던 아가씨한테 다음에 올게 해놓고 다시는 생각을 안해버리는게 그게 항구의 사랑입니다.

윤일로 라는 사람이 부른 항구의 사랑이

 

간곳마다 사랑하고 간곳마다 이별하는

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

 

이러다 보니까 항구의 사랑이라는게 진짜 쉽게 사랑하고 쉽게 이별하는 겁니다.

특히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수산업과 원양선이 발달하고 상선을 발달 하다 보니까 해외에 어업 전진기지가 많이 생겼습니다. 제일 많이 생긴곳이 어딥니까 스페인영 라스팔마스 북 아프리카 위쪽에 있죠 그때 한때 많이 할때에는 3만명 가까운 한국 사람들이 북적북적 했습니다. 그다음에 아프리카 가나 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쪽에도 15천명 가까이 그다음에 남 태평양에 있는 솔로몬 군도 거기도 어업 전진기지가 있어가지고 수천명이 한국사람들이 갑니다. 아까 말한데로 6개월 1년 바다만 보고 있던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면 현지 처녀들과 사랑을 해가지고 우리 기자가 갔더니 애들이 아빠!!” 한국말을 하면서 달라 붙더랍니다.

그래서 그런 2, 3세들이 많았는데 2006년에 문화부 종무실장을 할때에 한-가나 에 수교 30주년 기념행사에 제가 대한민국 대표로 갔더니 한국 해양대학을 나온 분이 가나 한인 회장을 하는데 주요 사업중에 하나가 한국 남자와 가나 처녀 사이에 태어난 2세들을 장학금을 주는 사업을 했습니다. 이거는 이런식으로 쉽게 사랑했다가 쉽게 헤어지는 항구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노래가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입니다. 그런데 이 삼천포 아가씨는 우리 마산 출신의 반야월선생이 진주 출신의 이재호 작곡가 하고 참친했답니다.

그래서 둘이서 1950년대 초에 한국전쟁통에는 대구에서 서라벌 레코드라는 레코드 회사를 만들 정도로 친했는데 한날 서울에서 만났더니 영 이재호 선생이 기분이 안좋더랍니다.

 

아이고 형님 와이럽니까했는데

아이고 내 속이 썩어죽겄네해서

우리집 딸이 삼천포에서 약사를 하고 있는데 그 서울머슴아를 사겼는데 결별 통보를 했는지 죽겄다 사서 속이 썩어서 죽겄네 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밤새 삼천포 아가씨를 작사를 해가지고 당시 곡을 잘 썼던

송운선 선생한테 얘기를 했더니 작곡을 잘 해가지고 은방울 자매 둘이 마포종점 부른 사람들인데 원체 이 노래가 잘 나가더랍니다. 이 얘기는 송운선 선생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때는 하루에 손으로 찍으니까 300장 정도 밖에 못 찍으니까 전국에 레코드 업자들이 와가지고 번호표를 받아가지고 여관방에서 대기를 하는데 삼천포 아가씨 레코드 한 장에 레코드사에서 안팔린 레코드 한 장을 끼워팔기를 해서 판게 몇 개월 사이에 38천장이 나가서 대박을 터트리고 있는데 같은 경쟁 레코드 사에서 심통이 나가지고

이 국가 건설을 해야할 시기에 저렇게 비탄적인 노래가 유행해서 됩니까?”

해서 공연윤리 위원회에서 비탄조라고 해서 금지가요가 되는 바람에 더 유행을 못했습니다.

 

비내리는 삼천포에 부산배는 떠나간다

어린나를 울려놓고 떠나가는 님이시여

이제가면 오실날자 일년이요 이년이요

돌아와요네 돌아와요네 삼천포 고향으로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전후 복구 사업에 증진을 하고 나라를 민주적으로 운영을 해야하는데 그게 안되다 보니까 부정선거를 하다보니까 4.19 때 쫓겨나고 대체되었던 민주당 정부는 신파 구파 하면서 서로 싸우다가 오라남으로 가라 북으로 해가지고 용봉주의적인 주장도 나오고 하니까 군부가 못참고 1961516일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가지고 그 새로운 대한민국은 반공국가이고 경제건설을 제 1로 하겠다 해가지고 경제 근대화 작업을 해가지고

농촌에 놀고 있는 사람들한테 기회를 많이 주었습니다.

농촌에 노예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도망을 가가지고 도시에 찾아가고

조금 배운 사람들은 죽어라고 공부를 해가지고 출세를 많이 했습니다.

인간관계가 흔히 그렇듯이 아무리 친해도 한쪽이 너무 출세를 해버리면 어색해집니다

제가 김영상 대통령 시절에 김광일 김영태 두 비서실장의 부좌관을 했는데

김영삼 대통령 친구 경남 중학교 3회 친구가 동기들 모임이 삼소회인데

옛날에는 영삼아 영삼아 하다가 청와대 와서 대통령 되어서 만나서 만나니까

그런식으로 못하니까 대통령님 하다가 나와가지고 비서실장 방에 와서

휴 아이고 참내 어색해 죽을뻔했다 그랬습니다.

한쪽이 너무 출세가 되어버리면 너무 인간관계가 어색해져버립니다.

남자와 여자가 촌동네에서 서로 결혼하자 했다가 남자가 억수로 출세를 해버리고

여자는 촌에 그대로 있으면 그 사랑이 유지가 되며 결혼이 되겠습니까 ?

안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1960년대 라디오 드라마, 소설, 영화, 대중가요의 소재가

출세한 남자친구 때문에 버림받은 여인의 한탄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한쪽은 너무 출세해 버리고 한쪽은 그대로 있으면 사회적 거리감이라는게 있습니다.

여기에 도식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는 예외없이 도시로 가서 성공을 하고

여자는 섬에서 버림 받아서 있고, 그 출세한 남자한테 가고 싶어도 원수 같은 바다

바다가 무엇을 상징하냐면은 사회적 거리감입니다. 그것 때문에 당신한테 못간다

이런것의 대표적인 노래는 남진의 가슴아프게도 , 그다음에 섬마을 선생도 그렇고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도 그렇고 내가 당신한테 가고 싶어도 당신하고 나하고

사회적 거리감이 당신은 출세해서 나는 못갑니다 하는 식인 것입니다.

그런 노래의 원조격인격인데 이 동백아가씨는 영화 동백아가씨 김기 감독이라는 사람이 만들어가지고 부산 대신동에 살고 있는 한산동 작사가 한테 작사를 시켜가지고

백영호 선생, 진주 출신입니다. 백영호 선생이 한시가만에 작사를 해가지고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인 최숙자 인데 돈을 많이 달라고 해서 당시로서는 크게 인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던 이미자 한테 부르게 했습니다. 신성일 엄앵란의 영화도 히트를 했지만

노래가 대박을 터트렸습니다. 얼마나 대박을 터트렸냐.

64년에 나와서 65년에 방송금지가요가 될 때 레코드가 20만장이 팔리고 68년에는 음반제작조치 까지 당하는데 200만장이 팔렸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5천만장 팔린거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 가요 사상 최대의 히트곡인 이 노래는 우리가 2절까지 부릅시다.

 

헤일수 없이 수 많은 밤을

내가슴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묻고

오늘도 기다리네 동백 아가씨

가신님은 그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 오려나

 

김용만의 회전의자 이 노래도 김용만이가 불러서 히트를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출세가 잘 되었던지 군사 구데타 같이 했던 사람은 삽시간이 별 하나가 4개가 되고 그랬죠. 그러고 행정고시 합격한 관료 출신들은 30대 초반에 차관보 30대 중반에 차관

40대 중반에 장관하면서 출세를 많이 했습니다. 조그만 기업하는 사람은 중견기업 삽시간에 대기업으로 이병철, 정주영부터 억수로 기업을 일궈가지고 출세를 했습니다.

출세라는 것은 세속말이고 학문적 용언는 계층상승이라고 합니다.

3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가 돈을 많이 벌어서, 둘째는 공부를 많이 해가지고, 셋째는 결혼을 통한 계층 상승이 있습니다.

어찌 됐던 출세가 많이 되었던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노래인데 부르고 싶은데 시간이 가서 이건 그냥 건너 뛰겠습니다.

 

이게 영화 옥이엄마의 주제곡인데 영화 내용은 이렇습니다.

영화 내용은 이렇습니다. 촌에서 못살던 소녀가 도시의 공장에 와서 취직을 했는데

사장집 아들이 아버지 따라서 공장에 왔다가 반한 사람이 있어서 아들이 사귀게 됩니다.

아들이 좋다고 하니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습니까

둘이 너무 좋아하는데 시부모도 오냐오냐 하다가 갑자기 그 여인이 신데렐라가 되었지요

갑자기 너무 좋아지면 불행이 다가오는 겁니다.

너무 안좋아하면 좋은일이 있을 거고 너무 좋으면 안좋을일이 있을거다 하는겁니다.

이 여인에게도 불행이 와가지고 남편이 병으로 죽고 자기 마음을 달래주는 옥이라는 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그런 여인을 위로해주던 시아버지도 중풍으로 죽고

죽은 옥이의 친구 아빠가 홀애비인데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유교주의적인 관습이 남아 있어서 못 받아들입니다.

이거 1절만 불러 볼까요

 

그렇게도 소중히 아꼈던 행복

이다지도 쉽사리 가실 줄이야

그대 떠난 그 후에 병든 내 마음

달래주던 옥이도 내 딸 옥이도

날 버리고 가버렸네 아빠 곁으로

 

1969년에는 별로 그런 일이 없었는데 한국 사회가 지금은 기러기 아빠가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국내에서도 가족이 같이 지내지도 못하고 남자 여자가 같이 직장일을 하다보니까 주말 부부가 되어버린게 대부분이고 돈을 잘 벌이는 사람들이 보내면 좋은데

아들 출세 시킬려고 내가 희생을 하지 싶어서.

근데 돈을 못 벌어도 애들을 보내고 하다 보니까 불황이 닥치면 돈벌이는 안되는데

마누라 하고 아들은 빨리 돈을 보내라고 하지 부인이 없는 집에 혼자 가다 보니까

맨날 술만 먹게 되고 우울증 스트레스로 건강이 안좋아지게 되고 그래서 아버지 산소나 이런데가서 소주를 까다가 목매달아 죽는 기사가 불과 몇 년전 까지만 해도 많이 났습니다.

국제적 이산을 하고 있는 한국인의 슬픈자화상이 담겨있는 이 기러기 아빠는 바로

1964년에 나온 동백아가씨와 1967년 섬마을 선생 1969년 기러기 아빠는 이미자의 3대 히트곡입니다.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 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아아~~~~아아아~~~~아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잃은 기러기

 

하늘엔 조각달 강엔 찬바람

제 너머 기적소리 한가로운 밤중에

마을마다 창문마다 등불은 밝은데

엄마는 어이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아아아~~~~~아아아~~~~~~아아

 

우리는 외로운형제 길 잃은 기러기

 

그래 인자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부터 경제 개발을 본격화 하니까 한국이 엄청 빠르게 발전이 됩니다. 수출만 하더라도 61년에 2700만 달러 수출 했는데 64년에 1억 달러 67년에 10억달러 77년에 100억 달러 수출을 하는등 세계인이 놀랄만한 경제기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도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는 걸 선전하고 싶어서 영화도 만들고 노래도 만들었는데 만든게 뭡니까 팔도강산입니다. 김희갑 황정순이 출연했습니다.

최희준이 불러서 그 노래고 히트를 했습니다. 대체로 관에서 만든 영화나 노래는 실패를 하는데 예외적으로 성공을 했는데, 우리 민간에서도 작사가와 작곡가들이 스스로 이 경제발전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그런걸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작사가 고향이라는 사람은 작곡가 남국인 같은 사람인데

이분이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포항에 낚시를 하러 가는데

저녁에 무릅에 충청북도 옥천을 지나가는데 마침 새마을 사업이 활기차게 되어서

초가집이 싹 없어지고 슬레이트 지붕을 울긋불긋 하게 칠해놓앗더니

마치 스위스 산간마을처럼 아름다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낚시를 하면서 밤새 작곡을 해가지고 남진이라는 사람한테 이걸 줘가지고 불러서 몹시 히트했습니다.

남진이 가슴아프게를 부르고 해서 히트곡을 하고 월남전 갔다 온 이후로 재기를 하게 된 계기가 되는데 이 노래는 우리나라 대중가요 사상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팬클럽이 생기게 됩니다.

남진이 팬클럽이 생기게 되니까 나훈아 팬클럽도 생기게 되고

그래가지고 나훈아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할때에 남진 팬들이 가가지고 나훈아를 얼굴을 쳐가지고 아직도 상처가 있는데 지금은 팬클럽이 일반화가 되었습니다만 그 시절에 이 노래 때문에 팬클럽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가 라이벌이 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노래고 한국 근대화의 밝은

면을 조명하게 된 대표적인 노래입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백년 살고싶어

봄이면 씨앗뿌려 여름이면 꽃이피네

가을이면 풍년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멋쟁이 높은빌딩 으시대지만

유행따라 사는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함께면

님과함께 같이산다면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백년 살고싶어

 

한백년살고싶어 한백년살고싶어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 이렇게 경제를 안정 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하다 보니까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야간이나 이런 사람들은 숨을 못쉬겠다고 계속 데모를 하는데 64년에 63사태나 삼선개헌반대 데모, 유신 반대 데모 라고 해가지고

굉장히 격렬하게 저항을 합니다. 이럴때에 소위 데모가라고 있는데 학생들 사이에 많이들 부른 것은 아침이슬같은 김명기가 작곡한 그런건데 대중들이 많이 부르면서 그런 데모가 체제저항적인 성격의 움직임이 있을 때 데모 현장에서 MT 같은데, 미팅 같은데 가가지고 많이 부르는 노래가 최인우가 작사하고 송창식이 노래한 고래사냥입니다.

 

1974815일 광복절 행사장에서 문세광이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육영수 여사를 죽게 합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한달뒤에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북한국장 김영광 두분이 박정희 대통령한테 보고하러 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보고를 다 듣고 김영광국장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 하니까 이분이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건 너무 안된 일입니다. 이 일을 원인을 살펴보면 일본에 사는 동포들이 국내 사정을 너무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 불러다가 사정을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하여서 일주일 뒤에 박정희 대통령이 철저하게 준비해서 시행하라 해가지고 그래서 75년부터 재일조총련계 모국방문 사업을 실시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60만 재일동포중에 25만 정도가 조총련계 인데 어찌 됐던 대부분은 경상남도 사람이고 두 번째 많은게 제주도 사람인데 북쪽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념적인 문제 때문에 고향이 못오는 사람들을 슬슬 가자고 해서 방해를 무릎쓰고 처음에는 비행기 두 대로 왔는데 배를 통해서 많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때 신분 방송 잡지 이런데서 욕을 일년 내내 특집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진행중에 있는데 작곡가 황선우 라는 사람이 김희 라는 이름이 잘 생각이 안납니다만은 통영출신의 무명의 가수가 있었는데 69년에 지 스스로 작곡해서 가져온 노래가 돌아와요 충무항에입니다. 꽃피는 동백섬이 아니고 충무 쪽에 아미산인지 미륵산인지

봄이 왔건만 이렇게 시작 되는데 거기에 곡을 붙여달라고 해서 취입을 하고 그분이 군대에 입대를 했더라 1224일날 대영각 호텔에 휴가를 나와서 잠을 자다가 그날 호텔에 사고가 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72년에 황선우 선생이 돌아와요 부산항으로 고쳐가지고

조용필한테 취입을 시켰는데 그때는 인기를 얻지를 못해서 노래가 폐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국방문단 사업이 활발해진 76년이 되니까 황선우 선생이 다시 조용필한테

그노래 한번 다시 불러보자 해서 재 취입을 했더니 이게 시기하고 딱 맞아가지고

처음에는 부산에 다방하고 길거리 레코드 하는 사람이 많이 틀어줘서 히트를 해가지고

그해 말에 KBS 가요대상을 받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가요가 되면서

오늘의 조용필이 만들어졌습니다.

재일조총련계 모국방문사업과 가장 관련이 높은 노래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메이던 긴긴날의 꿈이였지

언제나 말이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길을 막아섰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부산항이라는게 도대체 어떤 곳 입니까 ?

일제 시대때 일본에 우리가 230만명이 가 있었습니다.

기회를 찾아서 간 조선사라도 있지만 대부분 징병, 징용, 정신대 이런 것으로

울면서 끌려 갔습니다. 부관훼리호가 떠날 때면은 부산항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무엇입니까 ? 우리 남인수 선생이 불러서 노래했던 울며 헤진 부산항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나서 정권에 대한 취지를 모으려고 국풍이라는걸 여의도 바닥에서 만들었던 노래가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를 만들었고

1988년에는 88올림픽을 개최 하면서 손에 손잡고를 만들었죠.

그게 얼마나 히트를 했냐면은 그 1600만장의 레코드를 전국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우리나라에서 히트 했을 뿐만 아니라 1989년에 동,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때에 장벽을 깨뜨리면서 시민들이 그 노래를 불렀답니다.

이걸 보면은 노래라는게 한 개인의 심성을 순화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반영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큰 사건에도 영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즐겨 부르는 노래를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왜 이걸 옛날 사람들이 좋아했을까 ? 이런저런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노래가 당시에도 히트를 했고 지금에도 즐겨 부를수 있답니다.

여러분 아시겠죠 ? 감사합니다.

담당자
평생학습원 평생학습팀(055-749-8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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